[김홍기] 옷, 존엄과 가치를 드러내는 ‘품격’의 조건
김홍기의 패션 인문학

발행 2019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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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스타일링은 ‘고유한 매력을 가진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과거 패션 스타일링을 매우 교조적인 이론의 틀에 맞춰서
학습하고 서로에게 권해왔다.

 

서점에 갔다. 품격이란 제목을 단 책이 눈에 자주 띤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사회가 고도성장 과정을 통해 놓치거나 혹은 간과해왔던 ‘인간을 아름답고 깊은 존재’로 만드는 원칙에 눈뜨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바야흐로 한국사회는 품격논쟁 중이다.


‘품(品)’이라는 글자는 원래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입을 뜻하는 ‘구(口)’라는 글자가 세개 모여 있는 형태이니 이런 의미가 생겼을 것이다. 세 개의 구(口)자는 사람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의 격, 사람을 향해 짓는 제스처와 표정의 격, 타인을 향해 연출하는 옷차림의 격을 뜻한다. 대화와 표정, 옷은 입을 통해 나오는 말과 같다. 이 3가지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겉으로 드러낸다.


서구에서는 르네상스가 되면서 사람들은 유행을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낡은 스타일’이란 이유로 옷을 버렸고 ‘유행’하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을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도시생활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옷차림과 포즈와 표정을 관찰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위치는 내 역량과 타인에게 비춰진 첫인상에 따라 결정되었고 쇼핑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빚는 신성한 기술로 평가되었다.

 

이때의 패션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고, 타인에게 좋은 첫 인상을 줄 수 있을까를 서술한 각종 패션 스타일링 매뉴얼이 넘쳐났다. 무엇보다 패션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가 태어난다. 패션이 인간관계에서 리더십을 만드는 기술로서 사용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조직생활이 인간의 주 무대로 등장하던 이때, 사람들은 시간(Time)과 장소(Place), 경우(Occasion)에 따라 옷 입는 기술을 발전시킨다. 사냥과 축제, 연애를 위한 옷차림이 이때 개발되었다. 또한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분도 생겼다. 세상의 모든 패션 스타일링은 TPO와 성별, 네 방향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오늘날 옷에 관련된 많은 생각이 깨지고 있다.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별이 허물어지고 인간의 안락함과 기능성을 강조하면서 때와 장소에 맞춘 옷차림에 대한 생각도 흐릿해졌다. 특히 직장에선 ‘창의성의 극대화’를 강조하면서 편안하게 옷을 입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유행과 성별, TPO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최근 유명한 패션 스타일리스트의 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다. 매우 실망스러웠다. 패션 스타일링 수업을 통해 우리는 두상과 피부 톤, 헤어스타일을 고려하고 나아가 체형에 맞는 옷의 실루엣, 적절한 색상, 질감과 어울리는 무늬를 고르는 법을 배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배움이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유가 뭘까.


스타일리스트들은 인간의 몸을 얼굴형과 골격,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 목의 길이, 둔부의 크기 등을 고려해서 몇 가지로 나눈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나눈 체형은 인간의 몸이 가진 다양성을 풀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산업화 시대의 표준화 논리가 반영된 해묵은 기준이다. 스타일링은 ‘고유한 매력을 가진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과거 패션 스타일링을 매우 교조적인 이론의 틀에 맞춰서 학습하고 서로에게 권해왔다. 이론이란 뜻의 영어 ‘Theory’는 관조와 바라봄이란 뜻의 그리스어 ‘Theoria’에서 왔다.


요즘은 SNS로 일반인의 옷차림을 즐겨본다. 좋아요 버튼이 많은 착장은 이론적으로 살펴봐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다. 옷차림을 올리는 이들 중에는 경영자, 엔지니어, 의사, 화학자, 마케터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직장과 상황, 옷차림에 관한 고민을 나름의 생각으로 풀어낸 이들의 해법들이 녹아있다.


이들이 인기를 끄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진 속에서 연출한 자신의 이미지가 한결같고, 시즌마다 유행하는 트렌드 품목을 걸치지 않으며, 그들이 입은 옷의 실루엣과 색상, 재질, 소재가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옷을 입은 사람에 관한 일관된 ‘이야기’를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옷을 통해 품격을 창조하고 싶은가. 옷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들이야 말로 옷을 통해 ‘생의 서사’를 쓰는 창조자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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